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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과 줄무늬 바지가 죄가 되던 시절…그래도 사람 냄새는 따뜻했다

옛날이라고 하기에는 그리 멀지 않지만, 지금 생각하면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는 시절이 있었다.

서울 명동 거리를 걷다가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파출소에 끌려가고, 줄무늬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다시 단속되던 때였다. 무엇을 입고 어떤 머리를 하느냐까지 국가가 간섭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당국은 장발과 과도한 노출 등을 이른바 ‘퇴폐풍조’로 규정했다. 1973년 개정 경범죄처벌법이 시행되면서 장발과 당시 기준에 맞지 않는 복장은 공식 단속 대상이 됐다. 경찰이 자와 가위, 바리캉을 들고 거리의 청년들을 쫓아다니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명동과 종로, 신촌의 파출소에는 단속된 젊은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 시절의 기억에는 아찔한 순간도 남아 있다.

1972년 8월 5일 서울 청량리 대왕코너 1층 분식센터에서 프로판가스가 폭발했다. 불길과 연기가 건물 위층으로 번지면서 6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당시 6층에 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가까스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평범한 외출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간 하루가 됐다.

대왕코너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화재를 겪었다. 특히 1974년 11월 발생한 두 번째 화재는 6층 호텔 복도에서 시작돼 나이트클럽과 7층으로 번졌고 88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왕코너는 대연각호텔, 서울시민회관과 함께 1970년대 서울의 대형 화재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았다.

가난했지만 골목은 북적였다. 검정 솜이불 한 채를 온 식구가 함께 덮었고, 아랫목에는 밥그릇을 묻어두었다. 밤이면 천장에서 쥐들이 뛰어다녔고 아이들은 쥐꼬리와 회충을 학교에 가져가기도 했다.

신문이 도착하면 어른들은 오늘의 운세와 텔레비전 편성표부터 펼쳐봤다. 아이들은 고우영의 만화를 보기 위해 일간스포츠를 기다렸다. 주간경향과 선데이서울을 돌려 읽고, 잡지에 실린 주소를 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동네에 텔레비전이 한 대뿐인 곳도 많았다. 인기 드라마나 김일의 프로레슬링, 권투 중계가 있는 날이면 텔레비전이 있는 집의 작은 방이 동네 극장으로 변했다. 다방에는 마담과 음악을 틀어주는 DJ가 있었고 큰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단골손님만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외국 영화는 대부분 ‘토요명화’로 만났고 외국 노래는 모두 팝송이라 불렀다. 이소룡의 ‘정무문’, 성룡의 ‘취권’, 왕우의 외팔이 시리즈는 극장가를 휩쓸었다. 명절이면 중국 무협영화가 안방극장을 차지했다.

거리에는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지게꾼과 넝마주이가 있었다. 연탄가스와 토큰, 회수권, 주택복권, 말표 신발과 흰 고무신이 일상의 한가운데 있었다. 감기에는 판피린, 소화가 안 되면 훼스탈을 찾았고 멍이 들면 안티푸라민을 발랐다.

시발택시와 크라운택시가 달리고 삼륜차와 포니가 등장했다. 서울에 전차가 다니던 때에는 아이들이 철길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납작하게 만들어 장난감 열쇠를 만들었다. 전차비를 아끼려고 달리는 전차에서 뛰어내리다 다치는 사람도 있었다.

학교생활도 지금과 달랐다. 오전반과 오후반이 나뉘었고 오후반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공기놀이와 고무줄놀이를 하며 수업 시작을 기다렸다. 소풍 전날이면 비가 올까 봐 몇 번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옥수수빵을 배급받고 운동장을 돌며 군가를 불렀다. 당구장이나 극장에 갔다가 학생부 교사에게 붙잡히면 호된 벌을 받았다.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면 길을 걷던 사람도 그 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야간 민방위훈련이 있는 날이면 온 동네가 불을 끄고 어둠 속에 잠겼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잘 놀았다. 딱지치기와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달고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오징어놀이가 골목을 채웠다. 비싼 장난감은 없었지만 돌멩이 하나, 고무줄 하나만 있어도 하루가 짧았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불편하고 억압적인 시대였다. 가난과 안전사고, 국가의 과도한 통제도 있었다. 장발과 옷차림 때문에 파출소에 끌려가는 일을 아름다운 추억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따뜻해진다. 부족한 것을 서로 빌렸고, 먹을 것이 생기면 이웃과 나눴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함께 자랐고 어른들은 남의 집 아이도 자기 자식처럼 야단치고 보살폈다.

추웠지만 혼자 춥지 않았고, 배고팠지만 혼자 굶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은 가난이나 억압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살았던 골목,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했던 마음, 서로의 형편을 먼저 헤아리던 온기일 것이다.

옛날 옛날, 아주 가까운 옛날.

우리 모두가 이제 막 피어나던 연두색 시절이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선명하고, 다시 만날 수 없기에 더욱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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