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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과 호박의 예술가, 구사마 야요이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 전위예술가 구사마 야요이가 지난 14일 도쿄에서 별세했다. 향년 97세. 작은 물방울무늬와 호박을 현대미술의 상징으로 만든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에서 태어난 구사마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환시와 환청을 경험했다. 주변의 사물과 공간이 수많은 점과 그물무늬로 뒤덮이는 듯한 체험은 이후 그의 예술 세계를 형성한 원천이 됐다.

구사마에게 물방울무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점 하나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증식하면서 사람과 사물, 공간의 경계를 지우는 장치였다. 그는 이를 ‘자기 소멸’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개인이 무한한 우주 속으로 흡수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물방울과 그물무늬로 표현한 것이다.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간 구사마는 이듬해부터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캔버스를 촘촘한 그물무늬로 채운 ‘인피니티 네트’를 비롯해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조각, 거울과 조명을 이용한 설치 작품을 잇달아 선보였다. 보디페인팅과 패션쇼, 반전 퍼포먼스,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며 1960년대 뉴욕 전위예술계에서 이름을 알렸다.

호박은 물방울무늬와 함께 구사마를 상징하는 대표적 소재다. 어린 시절 집 주변 밭에서 식물을 관찰하며 자란 그는 호박의 둥글고 익살스러운 형태와 꾸밈없는 모습에서 친근함과 강인한 생명력을 느꼈다. 노란색이나 붉은색 호박 위에 검은 물방울무늬를 반복한 작품은 대중이 구사마의 예술을 가장 쉽게 기억하게 만든 이미지가 됐다.

1994년 후쿠오카에서 선보인 대형 노란 호박은 그의 첫 야외 조각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호박 조각은 일본 가가와현 나오시마를 비롯해 세계 여러 도시와 미술관에 설치됐다. 자연과 바다, 도시 풍경 속에 놓인 거대한 호박은 미술관 안에 머물던 현대미술을 일상 공간으로 끌어냈다.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온 구사마는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소설과 시를 발표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77년부터 도쿄의 정신의료기관에서 생활하면서도 인근 작업실을 오가며 창작을 계속했다. 정신적 고통을 숨기지 않고 이를 예술로 전환했다는 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됐다.

거울과 빛을 이용해 이미지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인피니티 미러 룸’은 관람객이 작품 안으로 직접 들어가 무한한 공간을 경험하도록 했다. 이 작품은 회화와 조각을 감상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관람객의 몸과 감각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2009년 시작한 회화 연작 ‘나의 영원한 영혼’은 2021년까지 약 900점으로 확장됐다. 2021년에는 ‘매일 사랑을 위해 기도한다’라는 새로운 연작을 시작했다. 작품 전반에는 무한과 우주, 사랑과 생명, 죽음이라는 주제가 일관되게 이어졌다.

구사마는 2016년 일본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영국 테이트 모던, 프랑스 퐁피두센터, 홍콩 M+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2017년에는 도쿄 신주쿠에 구사마 야요이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구사마의 예술은 고통스러운 내면의 이미지에서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밝고 강렬한 색채, 친근한 호박과 물방울무늬로 나타났다. 개인의 불안과 강박을 무한한 우주와 사랑의 메시지로 확장한 것이다.

무수한 점은 화면과 공간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퍼졌고, 호박은 현대미술을 어렵게 느끼던 대중에게 다가가는 통로가 됐다. 구사마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물방울과 호박은 현실과 환상, 개인과 우주의 경계를 넘나들며 계속 증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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