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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1월 15일, 중국 근대사의 그림자를 남긴 서태후 사망

1908년 11월 15일, 청말 권력의 정점에 섰던 서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못하게 하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며, 오늘날까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여성 통치자로 평가된다.

서태후는 제9대 황제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궁해, 아들 동치제와 조카이자 양자인 광서제를 사실상 조종하며 47년 동안 청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황제가 있으나 실질 권력은 서태후가 쥔 ‘양황제 체제’가 지속되면서 그는 황제보다 강한 존재로 군림했다.

그의 출신지는 안후이성 우후, 네이멍구 후허하오터, 산시성 창즈 등 설이 엇갈린다. 엽혁나랍 씨 성을 가진 말단 관리의 딸로 태어나 비교적 안정된 유년기를 보냈지만,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죽자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다. 수려한 외모 덕분에 17세에 궁녀로 선발됐고, 이를 계기로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섰다.

집권기의 청나라는 서구 열강 침탈과 내부 반란이 겹치며 근대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서태후는 대신들을 서로 견제시키며 권력을 유지했다. 화려한 사치 생활은 오래전부터 악명처럼 따라붙는다. 당시 농민 1년 식비에 해당하는 음식을 한 끼로 올렸다는 기록, 수천 벌의 의복과 비취 장식품, 비취로 만든 식기와 악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화원 증축에도 막대한 국방 예산이 투입됐다.

사생활에 얽힌 추문도 많다. 젊은 환관과 미소년을 가까이 두고, 은밀한 관계를 맺은 뒤 입막음을 위해 목숨을 빼앗았다는 기록들이 문헌 곳곳에 남아 있다. 말년에는 탈모가 심해 가발과 장식으로 외형을 유지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건강을 이유로 여성들을 불러 젖을 먹었다는 일화, 마음에 들지 않는 환관에게 대소변을 강제로 먹였다는 잔혹한 이야기는 그의 이미지에 더 큰 비극성을 더한다.

아들 동치제의 단명 역시 성병을 숨긴 채 잘못된 처방이 이어진 결과였다는 당시 의관들의 후일담이 남아 있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죽자 광서제를 앞세워 다시 권력을 쥐었고, 그의 전횡은 끝내 청나라마저 쇠락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로 기록된다.

1908년 사망 후 장례에는 120만 냥이 투입될 정도로 호화로웠고 수천 명의 인력과 물자가 동원됐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곧 청 제국 몰락의 전조로 이어졌다. 단 4년 뒤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태후는 악명과 능력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남아 있다. 절대권력의 실체, 국가 쇠퇴의 상징, 혹은 혼란기에 등장한 냉혹한 정치가라는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갈린다. 그러나 19세기 말 유교적 제국에서 여성이 40년 넘게 최고 권력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그가 중국 근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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