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거대한 조감도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눈 덮인 벌판 한가운데 세워진 간판에는 ‘영동 신시가지 개발사업계획 조감도’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지금의 강남을 상징하는 장면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논밭과 비닐하우스, 과수원이 펼쳐진 변두리 농촌이었다.
1970년 서울시는 영동1지구와 2지구를 통합한 대규모 신시가지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강남은 지금의 이름보다 ‘영동’이라는 지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영동은 ‘영등포 동쪽’이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압구정동·청담동·신사동·도곡동·반포동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강남 개발의 출발점은 서울의 과밀화 해소였다. 1960년대 후반 서울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강북 도심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정부와 서울시는 한강 남쪽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 인구를 분산하고 서울의 성장 축을 남쪽으로 확장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사진 속 조감도는 그 거대한 청사진을 보여준다. 도로망과 주거단지, 업무시설, 공원 등이 체계적으로 배치돼 있다. 당시 계획은 약 6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신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도로와 상하수도, 전기시설을 정비하고 정부기관과 공기업 이전까지 검토하며 개발에 속도를 냈다.
강남 개발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계기는 교통망 확충이었다. 1969년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개통됐고, 1970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됐다. 한강 이남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면서 영동 개발은 본격 궤도에 올랐다.
이후 반포와 압구정, 청담, 잠실 일대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고속버스터미널 이전과 지하철 건설, 학교 이전 정책까지 더해지면서 사람들은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강남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새로운 경제·교육 중심지로 성장했다.
개발 이전 강남은 서울 시민들에게 채소와 과일을 공급하던 농업지대였다. 그러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면서 농경지는 빠르게 사라졌고 땅값은 급등했다. 이 시기 등장한 ‘복부인’과 ‘말죽거리 신화’는 강남 부동산 열풍을 상징하는 사회현상이 됐다.
사진 속 사람들은 거대한 그림을 바라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누구도 지금의 강남을 정확히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허허벌판 위에 그려진 선과 도로, 건물 배치는 반세기 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과 가장 강력한 경제 중심지의 밑그림이 됐다.
결국 이 한 장의 조감도는 도시계획 자료를 넘어 대한민국 현대사의 전환점을 기록한 사진이다. 강남은 그렇게 지도 위에서 먼저 탄생했고, 이후 현실이 그 그림을 따라 움직였다.
한강 남쪽 허허벌판, 대한민국 부의 지도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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