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는 지난 4월 28일부터 5월 1일까지 경북 안동시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26차 세계대표자대회 및 수출상담회(2025 KOREA BUSINESS EXPO ANDONG) 행사장에 홍보부스를 마련해 독립운동가이자 근대 최초의 한상(韓商)으로 평가받는 최재형 선생을 세계 각국 한인 기업인들에게 알렸다.
이번 홍보 부스 운영은 2025년 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으로 위촉된 월드옥타 박종범 회장의 소개로 이뤄졌으며, 박 회장은 2020년 제1회 최재형상 단체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박 회장은 “한인 최초의 한상이라 할 수 있는 최재형 선생을 통해 해외 한인 기업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행사에서 제2회 최재형상 단체상을 수상한 수산그룹 정석현 회장은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도서 『독립운동가 최재형』(문영숙 저, 2014년, 서울셀렉션 출간) 1,000부를 구매해 참석 기업인들에게 배포하도록 후원했다.
최재형 선생은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러시아로 이주했다. 열한 살 무렵 포시에트 항에서 쓰러져 있던 그를 러시아 상선 선장 부부가 거두었고, 이후 6년간 세계 항해를 하며 사업가로서 자질을 키웠다. 18세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사업 경력을 쌓았고, 제정 러시아의 동방정책에 따라 군납사업으로 부를 이루며 ‘동양의 카네기’라 불릴 만큼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사익 대신 공익을 택했다. 번 재산으로 32개 한인학교를 세우고, 의병을 지원했으며, 1908년 동의회를 조직해 대한의군을 창설했다. 이 무장투쟁의 중심에는 안중근 의사가 있었고, 최 선생은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후 대동공보를 인수해 언론 활동에 나서며 하얼빈 의거를 뒷받침했고, 안중근 의사 순국 뒤에는 유족까지 돌봤다.
1910년 권업회를 조직하고, 1914년에는 한인러시아이주 50주년 기념대회를 준비했다. 이어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을 거쳐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의 외교와 자금 면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20년 일본군의 사월참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돼 재판 없이 4월 7일 일본군의 총탄에 희생됐다.
문영숙 이사장은 “이번 안동 대회 기간 동안 최재형 선생을 세계 각지에서 온 한인 기업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어 매우 뜻깊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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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상의 원조 최재형, 안동서 세계 한인기업인들에게 알려져
(사)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는 지난 4월 28일부터 5월 1일까지 경북 안동시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26차 세계대표자대회 및 수출상담회(2025 KOREA BUSINESS EXPO ANDONG) 행사장에 홍보부스를 마련해 독립운동가이자 근대 최초의 한상(韓商)으로 평가받는 최재형 선생을 세계 각국 한인 기업인들에게 알렸다.
이번 홍보 부스 운영은 2025년 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으로 위촉된 월드옥타 박종범 회장의 소개로 이뤄졌으며, 박 회장은 2020년 제1회 최재형상 단체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박 회장은 “한인 최초의 한상이라 할 수 있는 최재형 선생을 통해 해외 한인 기업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행사에서 제2회 최재형상 단체상을 수상한 수산그룹 정석현 회장은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도서 『독립운동가 최재형』(문영숙 저, 2014년, 서울셀렉션 출간) 1,000부를 구매해 참석 기업인들에게 배포하도록 후원했다.
최재형 선생은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러시아로 이주했다. 열한 살 무렵 포시에트 항에서 쓰러져 있던 그를 러시아 상선 선장 부부가 거두었고, 이후 6년간 세계 항해를 하며 사업가로서 자질을 키웠다. 18세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사업 경력을 쌓았고, 제정 러시아의 동방정책에 따라 군납사업으로 부를 이루며 ‘동양의 카네기’라 불릴 만큼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사익 대신 공익을 택했다. 번 재산으로 32개 한인학교를 세우고, 의병을 지원했으며, 1908년 동의회를 조직해 대한의군을 창설했다. 이 무장투쟁의 중심에는 안중근 의사가 있었고, 최 선생은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후 대동공보를 인수해 언론 활동에 나서며 하얼빈 의거를 뒷받침했고, 안중근 의사 순국 뒤에는 유족까지 돌봤다.
1910년 권업회를 조직하고, 1914년에는 한인러시아이주 50주년 기념대회를 준비했다. 이어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을 거쳐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의 외교와 자금 면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20년 일본군의 사월참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돼 재판 없이 4월 7일 일본군의 총탄에 희생됐다.
문영숙 이사장은 “이번 안동 대회 기간 동안 최재형 선생을 세계 각지에서 온 한인 기업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어 매우 뜻깊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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