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담배는 약초였을까, 독초였을까.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담배를 두고 극단적으로 엇갈린 시선을 보냈다. 누군가는 “근심을 태우는 연기”라 했고, 또 다른 이는 “나라를 좀먹는 기호품”이라 비판했다. 담배를 둘러싼 이 팽팽한 긴장은 오늘날의 흡연 논쟁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닌다.
신경미의 저서 ‘이 담배 열풍을 어찌할꼬?’는 조선 사회를 뒤흔든 담배의 사회·경제적 의미를 추적한 담배문화사다. 단순한 흡연 풍속이나 기호문화가 아니라, 담배가 조선의 경제와 외교, 민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들여다본다.
담배 긍정론의 대표 사례는 정조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궁궐 안에서 직접 담배를 재배할 정도의 애연가였다. 정조 16년(1792) 9월 1일, 그는 내원에서 수확한 담배를 신하들에게 하사하며 최고급 담배로 평가받던 ‘삼등초’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랑했다. 또 정조 20년 규장각 초계문신들에게 제시한 책문 제목도 ‘남령초’, 즉 담배였다.
정조는 담배의 효능에 대해 “가슴의 답답함과 울적함을 날려주고 춥고 습한 기운을 없애준다”고 말했다. 담배를 단순 기호품이 아니라 심신을 달래는 도구로 받아들였던 셈이다.
반면 실학자 이덕리는 담배를 조선 경제를 해치는 존재로 규정했다. 그는 ‘기연다’에서 18세기 조선 사회에 급속히 퍼진 담배 열풍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덕리가 가장 우려한 것은 담배 재배 확대에 따른 경제 왜곡이었다. 담배는 곡물보다 수익성이 월등했다. 비옥한 농토가 식량 대신 담배밭으로 바뀌자 그는 “온 백성이 금연하면 연간 1260만 냥을 절약할 수 있고 이는 흉년의 나라를 구할 재원”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담배는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강력한 경제 작물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에 담배가 유입된 것은 17세기 초 일본을 통해서였다. 이후 불과 5~6년 만에 어린아이들까지 피울 정도로 빠르게 확산됐다.
명문가 출신 문인이자 시조 작가인 윤선도 역시 보길도 등지에서 대규모 담배 재배에 나섰다. 담배가 양반부터 평민까지 모두를 사로잡은 거대한 시장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의 담배 논쟁은 결국 국가의 딜레마와 맞닿아 있었다. 영조는 비옥한 토지에서 담배 재배를 금지하라고 명령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담배 농사가 쌀농사보다 훨씬 돈이 됐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 담배는 청나라와의 외교에서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오늘날 전략물자에 가까운 역할을 했던 셈이다. 조선 조정이 명·청이나 일본처럼 강력한 금연령이나 재배 금지령을 내리지 못한 배경이다.
저자는 조선 조정의 ‘침묵’을 단순한 결단 부족이 아니라 “외교의 끈이자 백성의 위안을 끊지 못한 오랜 망설임”으로 해석한다.
책에는 담배가 등장하는 민화와 풍속화도 함께 실려 있다. 특히 긴 장죽을 문 호랑이 그림은 인상적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익숙한 표현 속 담배가 단순 소품이 아니라 당시 일상을 상징하는 장치였음을 보여준다.
김홍도의 풍속화 ‘담배 썰기’ 역시 눈길을 끈다. 그림 속에는 담뱃잎을 다듬는 사람들과 함께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의 모습이 등장한다.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듣는 풍경은 조선 후기 대중문화의 한 단면처럼 읽힌다.
결국 조선의 담배는 영험한 약초이자 사람을 홀리는 요사스러운 풀,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했다. 누군가에게는 울적함을 달래는 위안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나라의 질서를 흐리는 탐닉이었다. 조선은 그 두 시선 사이에서 끝내 담배를 금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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