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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세 번의 좌절 끝에 중국 개혁·개방의 길을 열다

덩샤오핑은 중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은 정치인이었다. 그는 세 차례 실각과 세 차례 복권을 반복하며 결국 중국을 오늘날의 경제대국으로 이끄는 ‘개혁·개방의 설계자’로 자리매김했다.

1977년 7월 22일, 덩은 중국공산당 부주석으로 복귀하며 극적인 정치적 귀환을 이뤘다. 같은 해 ‘4인방’이 몰락하면서 권력 핵심에 다시 오른 그는 1978년 12월 제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 노선을 공식화했다.

그의 첫 번째 실험장은 농업이었다.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가족책임제’를 전국으로 확산시켜 집단농업 체제를 허물었고, 그 결과 농민 소득과 식량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이어 국유기업 개혁과 향진기업 육성, 외국인 투자를 위한 경제특구 지정이 이어졌다. 1980년 선전·주하이·샤먼·산터우 네 곳이 첫 경제특구로 선정돼 세계경제와 연결되는 관문 역할을 했다.

덩의 실용주의는 외교에서도 드러났다. 1979년 미국과 수교를 정상화해 자본과 기술 유입의 길을 열었고, 1990년에는 개혁·개방의 상징처럼 보이는 맥도날드가 선전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개혁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보수파 반발로 정책이 위축되자, 덩은 1992년 남부 순시에서 개혁·개방의 지속을 강조하며 “계획경제든 시장경제든 수단일 뿐”이라는 유명한 발언으로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개념을 정당화했다.

그의 개혁 성과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1978년 1인당 소득은 156달러에 불과했지만 2024년에는 1만2969달러로 83배 늘었다. 같은 기간 중국의 GDP는 세계 11위에서 2위로 도약했다. 무엇보다 4천년 역사 속 되풀이된 대기근을 종식시키고 수억 명을 빈곤에서 구한 지도자로 평가된다.

키 157㎝의 작은 체구였던 덩샤오핑은 ‘작은 거인’, ‘오뚝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세 번의 좌절을 딛고 중국을 개혁과 개방의 길로 이끈 덩은 현대 중국을 만든 설계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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